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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08 — 2세·3세 경영 | 기업의 역사를 통한 돈의 흐름

legacy-road 2026. 4. 6. 17:15
EP08 — 2세·3세 경영 | 기업의 역사를 통한 돈의 흐름
기업의 역사를 통한 돈의 흐름  |  EP 08
승계는 어떻게 돈이 되는가

2세·3세 경영

창업주는 없는 곳에서 시작했다. 2세는 물려받았다. 3세는 물려받을 것을 다시 물려받았다. 그런데 이 세 번의 이동 과정에서 막대한 돈이 조용히 자리를 바꿨다. 세금을 줄이고, 주주를 희석하고, 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가며. 재벌의 세습은 단순한 가족 사업 승계가 아니다. 정교하게 설계된 자본의 이동이다.
① 역사 배경
과거엔 이랬다 — 창업 세대에서 세습 세대로

1세대 창업주들은 '맨손'이라는 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실제로는 국가의 특혜와 정치자금 교환이라는 토대가 있었지만, 적어도 그들은 사업을 직접 만들었다. 이병철은 설탕 공장에서 시작했고, 정주영은 자동차 수리점을 열었다. 구인회는 일제 강점기 포목상에서 출발했다.

문제는 이 거대한 제국을 다음 세대로 넘기는 방식이었다. 한국의 재벌 지배구조는 처음부터 세습을 전제로 설계된 구조가 아니었다. 1960~70년대 박정희 정부의 주도로 성장한 재벌들은 국가 지원에 기댄 고속 확장의 결과물이었다. 수많은 계열사를 상장해 외부 자본을 조달하면서 오너 일가의 지분은 자연스럽게 희석됐다. 총자산 수백조 원의 제국을 지분 5~10%로 지배하는 구조가 탄생한 것이다. 이 구조에서 승계는 단순한 '주식 증여'로 해결되지 않는다.

1980년대
2세 경영의 서막. 이건희(삼성), 정몽구(현대), 구본무(LG) 등 창업 2세들이 본격적으로 경영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아버지 생전에 계열사 대표직을 거치며 능력을 검증받는 방식이었다.
1990년대
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 1996년 삼성에버랜드(구 제일모직)가 전환사채를 주당 7,700원에 이재용에게 배정했다. 당시 시가의 10분의 1 수준으로 평가된 이 거래는 훗날 '이재용 승계의 첫 단추'로 지목되며 검찰 수사와 논란을 낳았다.
1997–2000년대
IMF 이후 승계 전략의 정교화. 외환위기로 재벌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오히려 오너 일가는 부실 계열사를 정리하고 핵심 지주사에 지배력을 집중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일감 몰아주기를 통한 비상장 계열사 육성 전략이 이 시기부터 본격화됐다.
2010년대
3세 시대의 개막. 이재용(삼성), 정의선(현대차), 구광모(LG)가 경영 일선에 나섰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주요 그룹 창업주·2세들의 건강 이상과 사망이 잇따르면서 승계 작업이 급물살을 탔다.
2015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이재용의 경영권 승계를 완성하는 핵심 거래로 지목됐다. 이재용이 23.2% 지분을 보유한 제일모직이 삼성전자 4% 지분을 보유한 삼성물산을 흡수하면서 '이재용→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의 지배구조가 완성됐다.
2025년 상법 개정
소액주주 보호 제도화.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이 '회사'에서 '주주 전체'로 확대됐다. 과거 오너 일가에 유리한 합병비율도 법적으로 따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효과는 아직 검증 중이다.

② 돈의 흐름
왜 그렇게 됐나 — 세습이 '사업'이 되는 구조

재벌 승계는 왜 이토록 복잡해졌을까. 핵심은 하나다. 한국 상속·증여세는 세계 최고 수준(최대 50%)인데, 오너 일가의 지분은 시가총액 기준으로 수조 원에 달한다. 합법적으로 세금을 전부 내면 지배력 자체가 유지되기 어려운 구조다. 이 모순이 온갖 편법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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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감 몰아주기

후계자에게 지분 100%의 비상장 계열사를 증여한 뒤, 그룹 계열사들이 이 회사에 일감을 집중 발주한다. 매출이 늘어나고 기업가치가 뛰면 후계자는 낮은 세금으로 거대한 지주사를 손에 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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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병·분할 설계

오너 지분율이 높은 계열사와 낮은 계열사를 합병할 때 비율을 오너에게 유리하게 설정하면, 법적 합병 절차를 밟으면서도 부를 이전할 수 있다. 전환사채(CB), 신주인수권부사채(BW)도 같은 원리로 활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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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저평가 이용

계열사 물적분할로 모회사 주가를 의도적으로 낮춘 뒤, 저평가 시점에 후계자가 주식을 취득하게 한다. 나중에 주가가 회복되면 취득 비용 대비 자산 가치가 급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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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출자·지주사 개편

A사→B사→C사→A사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를 지주사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오너가 지주사 지분만 확보하면 전체 그룹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 납부 세금 대비 지배력 확보 효율이 극대화된다.

이 과정에서 피해를 보는 주체가 있다. 바로 일반 주주들이다. 오너에게 유리한 합병비율로 주식이 희석되거나, 일감 몰아주기 대상이 된 계열사가 비정상적으로 성장해 다른 사업부가 상대적으로 위축되거나, 지주사 전환 과정에서 핵심 사업을 빼앗긴 상장사의 주가가 쪼그라든다. 이것이 경제학에서 말하는 '터널링(tunneling)'이다. 그룹 전체의 자원이 오너 지분율이 높은 쪽으로 몰래 빠져나가는 현상이다.

"외국에서는 한국 재벌을 보면 어떻게 100조가 넘는 회사를 상속세 한 푼도 안 내고 3대 이상 끌어갈 수 있냐고 묻는다. 기업 지배 주주들이 계열 간 자본 거래와 합병을 규제 없이 마음대로 하기 때문이다." — 최한수, 경제학자 (슬로우뉴스 인용)

③ 전환점
무엇이 바뀌었나 — 국민연금이 소환되던 날

2015년 7월, 삼성물산 주주총회장은 한국 재벌 승계사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를 남겼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안이 상정됐는데, 합병비율을 두고 논쟁이 붙었다. 삼성물산 주식 3주가 제일모직 1주로 교환되는 구조였다. 삼성물산이 4%나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의 가치를 고려하면 터무니없이 불리한 조건이었다.

당시 삼성물산의 최대주주는 국민연금(지분 11.21%)이었다. 모든 국민의 노후 자금을 운용하는 기관이 이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나중에 국정농단 특검 수사에서 드러난 사실은, 박근혜 정부가 이재용의 경영권 승계를 돕기 위해 국민연금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당시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은 징역 2년 6개월, 이재용은 삼성 자금을 횡령해 뇌물을 건넨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이 확정됐다.

케이스 스터디 —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2015)

구조: 이재용은 제일모직 지분 23.2%를 보유. 삼성물산은 삼성전자 지분 4%를 보유. 삼성전자 4% 지분은 당시 약 8조~10조 원 가치였으나, 합병비율에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는 논란이 일었다.

결과: 합병 성사 후 이재용은 '이재용→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로 이어지는 지배구조를 완성. 1심·2심 모두 합병 자체에 대한 불법성은 인정되지 않았다.

후폭풍: 2024년 국민연금이 이 회장과 삼성물산 법인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같은 해 국제중재재판소(PCA)는 한국 정부가 외국 펀드 엘리엇에 손해를 끼쳤음을 인정했고, 별개 재판에서 또 다른 펀드 메이슨에도 440억 원을 지급하라는 판정이 났다. 소수주주의 돈으로 경영권 승계를 이룬 구조라는 비판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삼성만이 아니었다. 한화그룹은 2001년부터 25년에 걸쳐 3세 승계 작업을 진행했다. 창업 3세인 김동관·김동원·김동선 삼 형제가 한화S&C(현 한화에너지)에 30억 원을 출자한 시점, 이 회사는 영업적자 상태였다. 이후 계열사 일감이 이 회사로 집중되면서 기업가치가 급등했고, 2026년 1월 기준 삼 형제와 한화에너지가 보유한 ㈜한화 주식 평가차익은 3조 2,000억 원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그룹 승계 핵심 기법 논란의 지점
삼성 에버랜드 CB→물산·제일모직 합병→지배구조 완성 합병비율 불공정, 국민연금 외압, 소수주주 피해
한화 비상장 계열사(한화S&C) 저가 취득→일감 집중→가치 극대화 일감 몰아주기, 편법 시드머니 조성
하림 비상장사 올품 지분 100% 증여→일감 집중→그룹 정점 장악 증여세를 회사 유상감자 자금으로 납부
현대차 정의선, 계열사 지분 취득→광주글로벌모터스 등 사업권 확보 지분 취득 과정 적정성 논란
LG 구광모, 지주사 ㈜LG 지분 상속→상대적으로 투명한 구조 상속세 약 9,000억 원 납부 (정상 납부 사례)

2026 현재 비교
4세 경영 시대 — "세습은 없다"는 선언 이후

이재용 회장은 2020년 5월 준법감시위원회 출범 당시 "4세 경영 세습은 없다"고 선언했다. 그 선언이 어떤 무게를 갖는지는, 지금 한국 재계의 현실을 보면 가늠이 된다. 2026년 4월 현재, 국내 50대 그룹 중 포스코·농협·KT 등 공공·공기업 성격의 기업을 제외한 44곳이 여전히 오너가 있는 재벌 구조다.

  • 삼성의 현재: 이재용 회장은 2025년 사법 리스크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러나 여전히 미등기임원 신분이다. 2016년 사내이사로 선임됐다가 국정농단 이후 2019년부터 미등기임원으로 남아있다. 2026년 2월 출범한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4기는 이 회장의 등기이사 복귀를 주요 과제로 꼽고 있다.
  • 상법 개정의 효과: 2025년 상법 개정으로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이 '주주 전체'로 확대됐다. 이론적으로는 2015년 삼성물산 합병 같은 거래가 앞으로는 법적 책임의 무게를 달리 받을 수 있다. 실효성은 향후 법원의 판례 축적에 달려 있다.
  • 한화 3세 논란: 2025년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3.6조 원 규모 유상증자를 발표하자 시장은 3세 승계를 위한 자금 설계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주가가 10% 넘게 폭락했다. 이후 규모를 2.3조 원으로 축소했지만, 한화 3세 승계 방식에 대한 시장의 의심은 가시지 않고 있다.
  • 일감 몰아주기 증여세: 2024년 대기업의 일감 몰아주기 증여세 총 결정세액은 2023년 대비 약 2배인 1,706억 원으로 집계됐다*. 세금은 늘었지만 승계 전략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라는 해석이 나온다.
  • 코리아 디스카운트와 승계: 한국 주식시장이 기업 가치 대비 저평가받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구조적 원인 중 하나로 불투명한 지배구조와 소수주주 경시 문화가 꾸준히 지목된다. 상법 개정이 이 디스카운트를 실질적으로 해소하는 계기가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⑤ 독자 시사점
나의 돈과 어떤 관계인가
그래서 우리는 어디를 봐야 하나

재벌 승계 이야기는 멀리서 보면 재벌가의 집안 문제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 꺼풀만 들추면 내 노후와 직결된 이야기가 나온다. 국민연금은 삼성전자의 2대 주주다. 2015년 삼성물산 합병에 국민연금이 찬성표를 던졌을 때, 그 찬성표 속에는 수천만 국민의 노후 자금이 담겨 있었다.

주목해야 할 질문은 두 가지다. 첫째, 상법 개정이 실제 법원의 판결로 이어지는가다. 이사가 소수주주에게 충실의무를 진다는 조항이 생겼지만, 법원이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해 오너 일가의 유리한 합병을 제동 거는 판례가 나오지 않으면 선언에 그친다. 향후 2~3년간 나오는 판결들이 이 조항의 무게를 결정한다.

둘째, 국민연금이 주주로서 제 목소리를 내는가다. 국민연금은 한국 주식시장 최대의 기관투자자다. 2015년처럼 정권의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독립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한다면, 재벌 승계의 판이 바뀔 수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의 실질적 작동이 그 열쇠다.

재벌 3세들이 경영 전면에 나선 지금, 한국 기업 지배구조는 사실상 실험 중이다. 1세 창업주의 카리스마, 2세의 거친 확장의 시대는 지났다. 3세들이 남기는 것이 기업의 성장인지, 아니면 또 다른 방식의 터널링인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결정되고 있다.

주석
* 일감 몰아주기 증여세 — 특수관계법인이 수혜법인에 일감을 집중 발주해 수혜법인 주주가 얻은 이익을 '증여'로 보고 과세하는 제도. 2012년 세법 개정으로 도입됐다. 2024년 대기업(상호출자제한기업) 기준 결정세액은 1,706억 원으로 전년(862억 원) 대비 약 두 배 증가했다. 다만 자산 5조 원 미만의 중견·중소기업은 규제 대상에서 제외돼 사각지대가 광범위하다는 지적이 지속되고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 — 기관투자자가 투자 기업의 경영과 의사결정에 능동적으로 관여해 기업 가치와 주주 이익을 높이도록 유도하는 자율 원칙. 영국이 2010년 처음 도입했고 한국은 2016년 채택했다. 국민연금은 2018년 가입했으나 실제 의결권 행사 방식과 강도를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대형 재벌의 주주총회 안건에 반대표를 행사하는 비율은 아직 낮은 수준이라는 평가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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