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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07 — SK·LG의 돈 | 기업의 역사를 통한 돈의 흐름

legacy-road 2026. 4. 6. 16:28
EP07 — SK·LG의 돈 | 기업의 역사를 통한 돈의 흐름
기업의 역사를 통한 돈의 흐름  |  EP 07
에너지·통신·화학, 보이지 않는 인프라 권력

SK·LG의 돈

삼성은 반도체로, 현대는 자동차로 한국 경제의 얼굴이 됐다. 그런데 당신이 오늘 통화를 하고, 기름을 넣고, 냉장고 문을 열고, 치약으로 이를 닦을 때 — 그 뒤에는 SK와 LG가 있다. 화려하지 않지만, 도처에 깔려 있다. 두 그룹이 그 자리에 앉기까지, 어떤 돈의 판단이 있었는가.
① 역사 배경
과거엔 이랬다 — 직물과 크림에서 시작된 두 제국

SK와 LG는 모두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출발선이 달랐다. LG의 뿌리는 1947년 부산의 작은 화학공업사였고, SK의 씨앗은 1953년 수원 근처 잿더미가 된 직물 공장이었다. 두 창업자 모두 전쟁을 뚫고 기업을 세웠지만, 그들이 선택한 첫 상품은 시대의 수요를 정확히 읽은 결과였다.

구인회는 부산 자택에서 여성용 크림 '럭키크림'을 만들어 팔았다. 해방 이후 국산 화장품이 전무하던 시절, 일제가 만들던 크림을 대체할 것이 필요했다. 락희화학은 크림에서 치약으로, 치약에서 플라스틱으로, 그리고 라디오와 냉장고를 만드는 전자회사로 뻗어나갔다. 최종건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선경직물 건물을 손수 복구해 직기를 재조립했다. 그는 폴리에스터 원사를 직접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선경합섬을 세웠다. 수직계열화, 원료부터 완제품까지 한 그룹 안에서 처리하겠다는 구상이었다.

LG 계보
1947
구인회, 부산에서 락희화학공업사 창업. 럭키크림 제조 시작.
1958
금성사 설립. 국내 최초 라디오·선풍기·냉장고·TV 생산. 삼성과의 비공개 분업 합의.
1967
호남정유·금성통신 설립. 구인회 별세, 아들 구자경이 경영 승계.
1983
그룹명 '럭키금성'으로 통합. Lucky의 'L'과 Goldstar의 'G'를 합쳐 1995년 LG로 개칭.
2020
LG화학 전지사업부를 물적분할, LG에너지솔루션 출범. 배터리 사업 본격 분리.
SK 계보
1953
최종건, 한국전쟁 직후 선경직물 인수. 폐허에서 직기 재조립.
1980
동생 최종현, 공기업 대한석유공사(유공) 인수. 섬유에서 에너지로 대전환.
1994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 주식 23% 시가보다 높은 가격에 인수. 통신 왕국의 출발.
1998
최종현 별세. 38세의 최태원 회장 취임. 외환위기 속 "Deep Change or Slow Death."
2012
하이닉스 인수로 반도체 진입. SK하이닉스 출범, 에너지·통신·반도체 3각 구도 완성.

두 그룹의 팽창 경로는 닮은 듯 달랐다. LG는 소비재에서 출발해 전자·화학을 축으로 확장했다. SK는 섬유에서 시작해 에너지, 그리고 통신으로 비약적으로 업종을 갈아탔다. 두 그룹 모두 '정부가 팔아넘기는 공기업'이 결정적 성장의 계기가 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② 돈의 흐름
왜 그렇게 됐나 — 공기업 민영화를 사먹는 방법

SK와 LG의 도약을 이해하려면 한 가지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왜 직물 회사가 석유를 팔고, 왜 화장품 회사가 원자력 발전용 변압기를 만들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국가가 팔겠다는 자산이 있을 때, 돈이 될 자산을 가장 빠르게 집어 든 회사가 다음 세대의 지배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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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 인수 — SK의 에너지 도박

1980년, 선경(현 SK)은 정부 민영화 대상인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했다. 섬유 회사가 정유사를 사들인다는 것은 당시 업계 상식 밖이었다. 그러나 최종현은 원유 가격 흐름을 읽고 있었고, 두 차례 석유파동 때 사우디로부터 직접 원유 공급 약속을 따내는 외교력을 발휘했다. 이 인수가 선경을 에너지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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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통신 인수 — 사돈 논란과 집념

SK가 1992년 제2이동통신 사업자로 선정됐을 때,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최태원의 결혼으로 사돈 관계였다는 사실이 불거져 사업권을 반납했다. 그러나 최종현은 포기하지 않았다. 1994년 한국이동통신 민영화 때 시가보다 높은 가격을 써내 결국 인수했다. 집념이 만들어낸 SK텔레콤의 탄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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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사의 첫 전자제품 — 밀수 리스크 감수

1958년 구인회가 금성사를 세울 때, 기술도 부품도 없었다. 일본에서 부품을 들여와 조립하는 방식이었는데, 당시 이는 사실상 밀수에 가까운 영역이었다. 그러나 국산 전자제품이 절실했던 시대적 요구가 있었고, 금성사는 '국내 최초'의 왕좌를 줄줄이 차지하며 전자산업의 기반을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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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터리로의 전환 — 화학이 미래를 낳다

LG화학은 플라스틱과 석유화학이 본업이었다. 그러나 2차전지 사업에 오래전부터 투자했고, 전기차 시대가 열리자 그 씨앗이 꽃을 피웠다. 2020년 LG에너지솔루션을 물적분할해 분리 상장할 때 공모 청약에 무려 114조 원의 증거금이 몰렸다. 화학의 DNA가 배터리 제국을 만들어냈다.

두 그룹의 돈의 흐름에서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 공기업 민영화 → 주력 인프라 사업 선점 → 독점적 수익 구조 확보 → 다음 산업으로 도약. LG가 가전과 화학을 기반으로 배터리까지 왔다면, SK는 섬유→에너지→통신→반도체라는 기이한 이동 경로를 그렸다. 두 그룹 모두 '국가가 버린 자산'과 '국민이 아직 모르는 미래 산업'을 가장 빠르게 간파한 집단이었다.

SK 시작
선경직물
1953
에너지
유공(SK이노)
1980
통신
SK텔레콤
1994
반도체
SK하이닉스
2012
LG 시작
락희화학
1947
전자
금성사(LG전자)
1958
화학·소재
LG화학
2차전지 투자
배터리
LG에너지솔루션
2020

③ 전환점
무엇이 바뀌었나 — 외환위기와 두 그룹의 분기점

1997년 IMF 외환위기는 한국 기업 지형을 완전히 뒤바꿨다. 그러나 SK와 LG는 대우·쌍용처럼 무너지지 않았다. 이 두 그룹이 살아남은 방식이 이후 재벌 지배구조의 새로운 모델이 됐다.

SK는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최종현 회장이 갑자기 별세하는 최악의 타이밍을 맞았다. 38세 최태원이 수장이 됐을 때, 시장은 SK가 흔들릴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최태원은 "천천히 사라지느냐, 아니면 깊이 변화하느냐"를 선택 앞에 놓고 구조조정 대신 사업 체질 전환을 택했다. 2003년에는 소버린자산운용이 SK 주식 14%를 매집해 경영권 탈취를 시도하는 '소버린 사태'가 터졌다. 이 위기는 역설적으로 SK가 지배구조 개혁에 나서는 계기가 됐고, 외부 주주와의 갈등을 겪으며 그룹을 더 단단하게 다졌다.

LG는 외환위기 이후 다른 방식의 혁신을 선택했다. 허씨 가문과의 동업을 정리하고, 형제들의 사업을 분리했다. GS그룹(2005년), LS그룹(2003년), LX그룹(2021년)이 LG에서 떨어져 나간 것은 내부 갈등을 봉합하는 방식이 아니라, 각자 독립된 경영체로 서게 하는 방식이었다. 분리가 곧 성장의 조건이었다. — LG그룹 분리 경영 원칙, 기업사 전반의 평가
전환점 SK의 선택 LG의 선택
IMF 외환위기 (1997~) 최태원 체제로 조기 전환, "Deep Change" 선언 비주력 계열 정리, 핵심 전자·화학에 집중
2000년대 소유구조 개편 소버린 사태 이후 지배구조 투명성 강화 GS·LS 계열 분리로 '형제 독립 경영' 확립
반도체·배터리 진입 (2010년대) 2012년 하이닉스 인수로 반도체 편입 2020년 LG에너지솔루션 분할 상장
스마트폰 철수 (2021) 해당 없음 LG전자, 모바일 사업 완전 철수. 가전·전장 집중 선언

두 그룹은 이 시기에 결정적인 체질 변화를 겪었다. SK는 M&A를 통해 사업 포트폴리오를 넓혔고, LG는 계열 분리와 선택·집중을 통해 무게중심을 재정비했다. 어느 쪽이 옳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두 갈래의 생존 전략이 서로 다른 자리에 도달했다.


2026 현재 비교
배터리 캐즘과 AI — 두 그룹의 지금

2026년 4월 현재, SK와 LG가 가장 예민하게 주시하는 숫자는 배터리 공장 가동률이다. 2022년 70~80%를 웃돌던 가동률이 2025년 50% 아래로 추락했다. 전기차 수요가 예상보다 느리게 살아나는 이른바 '캐즘(Chasm)' 국면이 길어진 탓이다.

3.2조 원
국내 배터리 3사
2025년 합산 영업적자
(AMPC 세액공제 제외)
47.6%
LG에너지솔루션
2025년 공장 가동률
(역대 최저)
9,319억 원
SK온
2025년 영업손실
(희망퇴직 진행 중)

그러나 위기의 성격이 두 회사에 다르게 작용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배터리 3사 중 유일하게 2025년 연간 흑자를 유지했다. ESS(에너지저장장치) 사업으로 빠르게 생산 구조를 전환한 전략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AI 데이터센터 확산으로 전력 수요가 폭발하면서 대형 저장장치 시장이 새로운 탈출구가 됐다. LG에너지솔루션은 테슬라로 추정되는 미국 기업에 5조 9,442억 원 규모의 ESS용 LFP 배터리 공급 계약을 따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SK온은 더 깊은 조정을 거치고 있다. 포드와 설립한 합작법인 '블루오벌SK'가 해체됐고, 서산 공장 투자 규모를 절반 가까이 줄였으며, 희망퇴직을 연이어 실시했다. 그러나 현대차와의 조지아 합작공장이 2026년 상반기 가동을 앞두고 있고, ESS로의 라인 전환도 속도를 내고 있어 완전한 반등의 기회를 버린 건 아니다.

SK그룹은 AI 데이터센터를 '네 번째 성장 동력'으로 공식 선언했다. 울산에 AWS와 공동 추진 중인 AI 데이터센터는 SK의 반도체(SK하이닉스)·에너지(SK이노베이션)·통신(SK텔레콤) 역량을 모두 집결한 대형 프로젝트로 평가된다. SK하이닉스가 HBM(고대역폭 메모리) 시장에서 삼성을 앞선 위상을 유지하는 동안, SK 전체가 AI 인프라 전반으로 진입하는 그림이다.

  • 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 3사 중 2025년 유일 흑자. ESS 라인 전환 선제 대응이 주효. 그러나 2026년 설비투자를 전년 대비 40% 이상 삭감하며 '내실 경영' 모드.
  • SK온: 2025년 9,319억 원 적자. 블루오벌SK 해체, 서산 투자 축소, 희망퇴직 단행. 현대차 조지아 합작공장 가동으로 하반기 반등 여부 주목.
  • SK하이닉스: HBM 시장에서 엔비디아 공급 1위 위상 유지. AI 수혜가 SK 전체 그룹의 버팀목 역할.
  • LG전자: 스마트폰 철수 이후 가전·전장(자동차 부품) 중심 재편. B2B 사업이 그룹 전체 매출의 3분의 2 돌파.
  • 공통 변수: 미국 IRA AMPC(배터리 생산세액공제) 종료 시점을 둘러싼 불확실성. 중국 CATL의 저가 공세로 글로벌 점유율 잠식 지속.

⑤ 독자 시사점
나의 돈과 어떤 관계인가
그래서 우리는 어디를 봐야 하나

SK와 LG는 삼성·현대처럼 자주 신문 1면을 장식하지 않는다. 그러나 두 그룹의 사업은 일상의 인프라 깊숙이 박혀 있다. 당신의 휴대폰 통신료는 SK텔레콤으로, 세탁기·냉장고는 LG전자로, 전기차 배터리는 LG에너지솔루션이나 SK온으로, 주유소 기름은 SK이노베이션으로 흘러들어 간다.

지금 봐야 할 첫 번째 변수는 배터리 캐즘이 언제 끝나느냐다. 전기차 수요 회복 속도가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의 실적을 직접 결정한다. 시장 전망은 2027년 전후로 본격 회복을 예상하지만*, 중국산 배터리의 저가 공세와 트럼프 행정부의 IRA 정책 변화가 변수로 남아 있다.

두 번째는 ESS와 AI 데이터센터 수요가 진짜 구원투수가 될 수 있느냐다. 전기차를 대신해 AI 데이터센터용 대형 저장장치 시장이 열렸다. SK는 여기서 통신·에너지·반도체를 한 묶음으로 파는 종합 AI 인프라 사업자를 꿈꾼다. LG는 ESS 시장에서 빠른 선점을 노린다. 두 전략이 실제 숫자로 입증되는지는 2026~2027년이 시험대다.

국민연금은 LG에너지솔루션의 대주주이며 SK하이닉스에도 대규모 지분을 갖고 있다. SK와 LG의 배터리 전쟁 결과가 결국 우리 모두의 연금 수익률에도 영향을 미친다.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주석
* 캐즘(Chasm) — 신기술 제품이 얼리어답터(초기 수용자) 단계를 지나 일반 대중에게 퍼지기 직전, 일시적으로 수요가 정체되거나 감소하는 구간을 뜻한다. 미국 경영 컨설턴트 제프리 무어(Geoffrey Moore)가 저서 『캐즘 마케팅』(1991)에서 개념화했다. 전기차 시장에서는 2023년부터 본격화된 수요 둔화 국면이 이에 해당하며, 초기 친환경 지지층 수요는 충족됐지만 가격·충전 인프라·주행거리 등 현실적 장벽이 대중 전환을 막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업계 컨센서스는 2027년 전후로 회복 국면 진입을 전망하고 있으나, 미국의 정책 변화와 중국 저가 공세로 불확실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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