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의 확장 논리
1960년대 한국에는 자본시장이 사실상 없었다. 기업이 돈이 필요할 때 증권을 발행해 투자자를 모으거나, 사모펀드의 지원을 받거나, 벤처캐피털을 노크하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코스피가 본격 가동된 것이 1980년이고, 그 이전까지 기업이 외부에서 자금을 끌어오는 길은 사실상 은행 대출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 대출의 수도꼭지는 정부가 쥐고 있었다.
이 구조에서 한 가지 사업을 잘하는 것만으로는 기업을 키우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익을 남겨도 그걸 재투자할 마땅한 금융 도구가 없었고, 주식 공모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재벌들이 택한 방법은 계열사 확장이었다. 번 돈을 새 회사에 출자하고, 그 회사가 또 다른 회사를 세우는 방식으로 그룹 규모를 키웠다. 이것이 이른바 '내부 자본시장'의 탄생이다.
외부 금융시장(주식·채권·벤처투자)이 발달하지 않은 환경에서, 재벌 그룹 내부에서 자금이 계열사 간에 이동하는 구조를 말한다. 잘 버는 계열사의 이익이 어려운 계열사를 지원하고, 새 사업에 필요한 초기 자본을 그룹 내부에서 조달한다. 이 시스템은 외부 투자자 없이도 사업 다각화가 가능하게 해주었지만, 부실 계열사를 끝없이 지원하는 부작용도 낳았다.
1973년 중화학공업화 선언은 이 확장 논리에 불을 질렀다. 박정희 정부는 철강·조선·기계·전자·화학·비철금속 6개 산업을 '전략산업'으로 지정하고, 기존에 이미 규모를 갖춘 재벌 기업들을 집중 육성했다. 중화학공업은 대규모 초기 투자가 필요한 산업이다. 정부가 이 비용을 재벌에게 저리 정책자금으로 제공했고, 재벌들은 그 자금으로 새 계열사를 설립했다. 이것이 문어발의 뿌리였다.
재벌 총수가 단돈 50억 원으로 어떻게 수백 개 계열사를 지배할 수 있었을까. 그 비밀이 순환출자다. 원리는 단순하다. A라는 회사가 B를 지배하고, B가 C를 지배하고, C가 다시 A에 출자하는 식으로 고리를 만든다. 이렇게 하면 총수가 A에 투자한 돈이 B와 C를 거쳐 다시 A로 돌아오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20% 보유
C → A 재출자로 고리 완성 → 가공자본 발생
실제 사례로 보자. 총수가 100억 원을 투자해 A사를 설립한다. A사가 B사에 50억 원을 출자하고, B사가 C사에 30억 원을 출자한다. 그리고 C사가 다시 A사에 50억 원을 출자하면, A사의 자본금은 150억 원으로 불어난다. 총수는 여전히 A사의 대주주고, A는 B·C의 대주주다. 100억 원을 넣었는데 이 순환구조를 통해 세 회사를 장악했다. 투자 없는 지배력 확장이다.
1990년대 롯데의 경우 80여 개 계열사가 무려 416개의 순환출자 고리로 엮여 있었다고 전해진다. 신격호 회장 일가의 한국 롯데 직접 지분은 2%대에 불과했는데도 전체 그룹을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순환출자로 엮인 계열사들이 서로의 대주주가 되면, 외부에서 한 계열사의 지분을 사들여도 그룹 전체의 경영권을 빼앗기 어렵다. 2003년 소버린이 SK를 공격할 때 이 구조가 방패막이 됐다.
외부 투자자 없이도 계열사 간 출자로 신사업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자본시장이 빈약했던 시절, 이는 빠른 사업 확장을 가능하게 한 핵심 수단이었다.
다양한 업종에 계열사를 두면, 한 산업이 무너져도 다른 곳에서 버틸 수 있다. 재벌의 다각화는 단순한 욕심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기도 했다.
총수 일가가 지분을 가진 계열사에 그룹 내 물량을 집중시켜 가치를 높인 뒤 승계 재원으로 활용하는 구조. 내부 자본시장의 어두운 변형이다.
당시 지주회사 자체가 불법이었기 때문에 기업들은 순환출자 외에 선택지가 없었다. 재벌이 나쁜 것을 알면서도 순환출자를 택한 것이 아니라, 법이 허용한 구조 안에서 가장 유리한 방법을 택한 것이다. — 재계 지배구조 관련 복수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
순환출자 구조의 치명적 약점은 1997년 IMF 외환위기에서 드러났다. 계열사 간 채무보증이 사슬처럼 엮여 있던 탓에, 한 계열사가 흔들리면 보증을 선 다른 계열사까지 함께 무너졌다. 대우그룹은 30여 개 계열사가 200조 원에 달하는 부채를 안은 채 해체됐다. 그룹 전체가 한 덩어리로 묶여 있다는 사실이 '규모의 안전망'이 아니라 '공멸의 뇌관'이었음이 밝혀진 순간이었다.
IMF 이후 정부는 두 가지 방향으로 규칙을 바꿨다. 첫째, 계열사 간 채무보증 금지. 둘째, 그동안 금지했던 지주회사 체제를 허용했다. 지주회사는 계열사들의 주식을 보유하고 관리하는 회사다. 순환출자처럼 서로가 서로를 지배하는 복잡한 고리 대신, 꼭대기의 지주회사가 자회사→손자회사 방식으로 수직 지배하는 투명한 구조다.
A→B→C→A의 고리로 서로가 서로를 지배. 소수 지분으로 전체 지배 가능하지만, 부실이 전파되면 그룹 전체가 흔들린다. 지배구조 파악 자체가 어렵다.
지주회사→자회사→손자회사의 수직 계층. 출자 관계가 명확해 투명성이 높아진다. 다만 지주사 지분 확보를 위한 막대한 자금이 필요해 승계 비용이 커진다.
SK그룹은 2003년 소버린 사태를 계기로 경영권 방어의 한계를 절감하고 지주사 전환을 서둘렀다. LG는 비교적 일찍부터 ㈜LG를 지주회사로 전환해 체제를 정비했다. 삼성만이 예외였다. 삼성은 '이재용 → 삼성물산 → 삼성생명 → 삼성전자'의 지배 구조를 만들었지만, 형식상 지주사가 없는 독특한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삼성전자가 금융계열사인 삼성생명과 엮여 있어 금융지주회사법의 규제를 받기 때문이기도 하다.
| 그룹 | 전환 방식 | 현재 지배구조 | 특이사항 |
|---|---|---|---|
| SK | 2007년 SK㈜ 지주사 전환 | SK㈜ → SK하이닉스·SKT 등 | SK하이닉스는 지주사의 '손자회사'로 규제 이슈 발생 |
| LG | 2003년 ㈜LG 지주사 출범 | ㈜LG → LG전자·LG화학 등 | 국내 대기업 중 비교적 이른 지주사 전환 |
| 삼성 | 지주사 미전환 (순환출자 해소) | 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 | 금융·비금융 혼재로 지주사 전환 어려움 |
| 현대차 | 2018년 이후 지배구조 개편 |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 순환 해소 | 가장 늦게 순환출자를 해소한 대형 그룹 중 하나 |
| 롯데 | 롯데지주㈜ 설립 (2017~) | 롯데지주 → 롯데쇼핑·롯데케미칼 등 | 과거 416개 순환출자 고리를 전면 해소 |
2026년 4월 기준,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된 지주회사 체제 전환 공시대상 기업집단은 45개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다. 겉으로 보면 순환출자 시대가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공정위의 최근 분석에 따르면, 지주사 체제로 전환했다는 45개 집단 중에서도 지주사 구조 밖에 384개 계열사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더구나 그 중 60%가 사익편취 규제 대상 회사로 확인됐다.
형식은 바뀌었지만 본질은 닮아 있다. 지주사 체제로 전환하면서 경영 투명성은 높아졌지만, 이번엔 지주사 '바깥'에 비상장 계열사를 두고 일감을 몰아주거나, 총수 일가가 직접 지분을 가진 '체제 밖 회사'를 이용해 지배력을 유지하는 방식이 새로운 논란이 됐다. 게임의 규칙이 바뀌면 플레이어들도 새로운 방식을 찾아낸다.
- 삼성의 특수성: 삼성은 여전히 지주사 체제가 아니다. 이재용 회장 → 삼성물산(18.2%) → 삼성생명(19.3%) → 삼성전자(8.51%)의 지배 구조가 유지되고 있으며, 삼성전자의 경영권 승계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이재용 회장의 경영권 불법 승계 관련 재판은 2026년에도 계속되고 있다.
- 3·4세 경영 본격화: 2025년 공정위 집계 기준, 주요 20대 그룹 중 상당수가 이미 3·4세 경영 체제로 전환했다. 이들은 지주사 지분을 물려받는 방식으로 경영권을 승계하면서, 과거 순환출자 시대보다 더 많은 비용을 세금으로 납부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 새로운 논란 — 지주사 밖의 그늘: 지주사 체제 전환 이후, 총수 일가가 직접 지분을 가진 비상장 계열사에 그룹 내 일감을 집중시키는 '사익편취'가 새로운 규제 이슈로 떠올랐다. 형식이 바뀌어도 지배구조의 본질적 문제는 반복됐다.
- 코리아 디스카운트와의 연결: 복잡한 지배구조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 주식에 할인을 요구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핵심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이재명 정부가 추진 중인 상법 개정과 지배구조 개혁의 실효성이 이 디스카운트 해소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재벌의 확장 논리를 이해하면, 뉴스에 나오는 지배구조 관련 기사들이 다르게 읽힌다. 삼성물산 주가가 오르면 이재용 회장의 삼성전자 지배력이 강화되고, 삼성생명 배당이 늘면 삼성물산의 수익이 커진다는 식의 연결고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지주사 체제로 전환한 기업들의 경우, 지주사 주가와 핵심 자회사 주가의 괴리가 클수록 저평가 여부를 따져볼 여지가 있다.
주목해야 할 두 가지 흐름이 있다. 하나는 상법 개정 이후 이사회의 변화다. 이사의 충실의무가 주주 전체로 확대되면서 일감 몰아주기처럼 소액주주를 희생시키는 내부거래가 법적으로 도전받을 수 있게 됐다. 얼마나 실효성 있게 작동할지가 관건이다.
다른 하나는 승계 비용의 증가다. 순환출자 시대에는 적은 돈으로 경영권을 물려줄 수 있었다. 지주사 체제로 바뀌면서 지분을 정직하게 물려받아야 하는 구조가 됐고, 증여세 등 세금 부담이 커졌다. 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재벌들이 어떤 방법을 선택하느냐가 향후 한국 주식시장의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재벌 체제의 균열과 돈의 대이동
대우는 왜 무너졌고, 삼성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위기 속에서 누가 돈을 잃고, 누가 돈을 벌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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