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돈
정주영의 출발점은 허름했다. 1915년 강원도 통천의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나 몇 차례 가출 끝에 서울로 올라왔고, 공사장 막노동과 쌀가게 배달원을 전전했다. 그가 처음 자신의 이름으로 사업을 시작한 건 1940년, 서울 아현동의 자동차 정비소 '아도서비스'를 인수하면서였다. 삼성의 이병철이 일본인이 남긴 공장과 은행 주식을 불하받아 제국을 키워나간 것과는 결이 달랐다. 현대는 맨주먹으로 공사판에서 시작했다.
결정적인 전환은 한국전쟁이었다. 정주영은 미군 통역장교로 복무하던 동생 정인영 덕분에 주한미군 발주 공사를 사실상 독점하다시피 수주했다. 서울 수복 이후에는 낙동강 교량 복구, 한강 인도교 재건 같은 대형 공사가 줄을 이었다. 건설업에서 쌓은 현금이 다음 도박의 종잣돈이 됐다. 1960년에 이르러 현대건설은 국내 건설업체 중 도급한도액 1위 자리에 올랐다.
1965년 현대건설은 태국의 고속도로 건설 사업에 참여하며 국내 최초 해외 건설 진출을 이뤄냈다. 1967년에는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어 현대자동차를 설립했고, 1973년엔 박정희의 중화학공업 육성 드라이브에 올라타 현대조선중공업을 세웠다. 건설에서 자동차로, 자동차에서 조선으로. 정주영은 항상 자기 자본이 없는 곳으로 먼저 달려들었다.
현대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는 '빚'이다. 정주영은 자본이 모이면 투자하는 게 아니라, 먼저 투자를 벌인 뒤 갚아나가는 방식을 택했다. 이 방식이 가능했던 데는 세 가지 구조적 조건이 있었다.
울산조선소의 경우 조선소가 완공되기도 전에 그리스 리바노스 사에서 유조선 2척을 먼저 수주했다. 수주 계약서를 담보로 영국에서 차관을 받아 공사비를 충당했다. 미래의 매출이 현재의 자본이 됐다.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방침에 따라 현대조선·현대차는 저금리 정책자금과 세제 혜택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민간 기업이 아니라 국가 산업 프로젝트의 대리 실행자로 움직인 셈이다.
1970년대 중동 건설에서 벌어들인 달러가 국내로 환류되어 조선소와 자동차 공장의 설비 투자 재원이 됐다. 현대 내부에서 돈이 사업 간에 돌아가는 내부 자본시장이 작동했다.
365일 돌관작업*으로 공기를 절반 이하로 단축했다. 빠른 완공은 이자 비용을 줄이고, 다음 사업에 더 빨리 뛰어들 수 있게 했다. 부채 경영에서 속도는 곧 생존이었다.
이 메커니즘의 맹점은 분명했다. 정부가 정책 지원을 끊거나, 수출 시황이 꺾이거나, 금리가 급등하면 전체 구조가 흔들렸다. 실제로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현대그룹은 벼랑 끝으로 몰렸다. 정주영이 눈을 감은 2001년, 그가 평생 쌓아올린 제국은 현대자동차그룹·HD현대(구 현대중공업그룹)·현대건설 등 여러 갈래로 쪼개졌다. '왕자의 난'이라 불린 형제들 간의 경영권 분쟁 끝에 난 결과였다.
정주영의 부채 경영은 한국 경제가 허락한 특수한 환경의 산물이었다. 고도성장기에 정부가 은행을 통제하고 산업 자금을 배분하는 구조에서, 국가 의지를 등에 업은 기업은 '감당 못 할 빚'을 지는 게 오히려 합리적 전략이었다. 그 게임의 판이 바뀐 순간이 바로 1997년이었다. — 현대그룹 부채 경영 방식에 대한 경제사학계의 일반적 평가
현대의 역사에서 첫 번째 전환점은 1976년 '포니'의 탄생이다. 독자 개발 엔진과 독자 디자인으로 만든 한국 최초의 고유 모델 자동차. 그 이전까지 현대차는 포드에서 부품을 받아 조립하는 수준이었다. 포니의 성공은 현대가 단순 조립 공장에서 벗어나 기술 기업으로 이행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두 번째 전환점은 1983년 울산조선소가 세계 1위에 오른 것이다. 조선업에 뛰어든 지 10년 만이었다.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을수록 더 달려드는 정주영식 경영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이후 현대중공업은 엔진·해양플랜트·방산으로 사업을 확장하며 단순 조선사를 넘어서는 종합 중공업 기업으로 성장했다.
결정적 균열은 1997년에 왔다. 현대그룹은 IMF 외환위기 당시 부채비율이 500%를 넘나드는 상황에 처했다. 현대건설은 유동성 위기에 빠졌고, 정주영 사망(2001년) 이후 아들들 사이의 경영권 분쟁이 터졌다. 그 결과 현대는 현대자동차그룹(정몽구), 현대중공업그룹(정몽준), 현대백화점그룹(정몽근) 등으로 분할됐다.
| 분리 기업집단 | 계승 사업 | 2026년 현재 위상 |
|---|---|---|
| 현대자동차그룹 | 자동차·철강(현대제철) | 글로벌 전기차 시장 공략 중. 아이오닉 시리즈 유럽 2위 브랜드 |
| HD현대그룹 | 조선·해양·에너지 | 조선 슈퍼사이클 수혜. 시총 재계 5위권 진입 |
| 현대건설 | 건설·인프라 | 현대자동차그룹이 최대주주. 국내 건설 빅3 |
| 현대백화점그룹 | 유통·패션 | 국내 3대 백화점그룹 |
2026년 4월, 정주영이 남긴 유산은 두 개의 대형 전장에서 동시에 싸우고 있다. 하나는 현대자동차그룹의 전기차 전환 전쟁, 다른 하나는 HD현대로 이어진 조선업의 슈퍼사이클이다.
- 현대차 전기차 — 빛과 그늘이 공존: 2026년 1분기 미국 시장에서 아이오닉 5는 전년 대비 14% 판매 증가를 기록했다. 보조금 없이도 살아남는다는 걸 증명했다. 반면 아이오닉 6는 같은 기간 75% 급감하며 세단형 전기차 수요의 한계를 드러냈다. 현대차 전체 판매는 역대 1분기 최고 기록이지만, 실질적인 실적을 방어한 건 전기차가 아닌 하이브리드였다. 싼타페 하이브리드 47%, 엘란트라 하이브리드 141% 증가라는 수치가 말해준다.
- 아이오닉 3 — 유럽 소형 전기차 시장 승부수: 현대차는 2026년 4월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소형 전기 해치백 아이오닉 3를 세계 최초 공개할 예정이다. 튀르키예 현지 생산으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고 BYD·폭스바겐과 정면 대결에 나선다. 유럽에서 아이오닉 브랜드 전기차 판매는 지난해 48% 증가한 11만 대를 기록하며 테슬라에 이어 2위 브랜드로 올라선 상태다.
- HD현대 — 조선 슈퍼사이클 2막: 국내 조선 빅3의 2025년 3분기 누적 영업이익은 4조 3,527억 원으로, 2024년 전체 영업이익의 두 배를 넘어섰다. 정주영이 지은 울산조선소에서 출발한 HD현대중공업은 3~4년치 수주 잔고를 이미 확보한 상태다. 2026년을 '조선 슈퍼사이클 2막'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한편으론 전 세계 선박 발주량이 감소 추세여서 '수주 절벽' 경고음도 동시에 울리고 있다.
- MASGA와 미국 방산 시장: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조선업 재건 프로젝트(MASGA)로 한국 조선사에 미 해군 함정 MRO 물량이 새로운 수익원으로 부상했다. 정주영이 500원짜리 거북선으로 영국 은행을 설득하던 시절과는 전혀 다른 지형에서, 그의 후예들이 새로운 판을 짜고 있다.
현대의 역사에서 가장 자주 들리는 말은 '불굴의 도전 정신'이다. 하지만 그 서사 뒤엔 언제나 국가의 보증과 낮은 금리가 있었다. 정주영이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건 그의 배짱 때문만이 아니라, 국가가 그 배짱을 뒷받침해주는 금융 구조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스타트업이나 중소기업이 같은 방식으로 '일단 지르고 보는' 전략을 택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투자자의 시각에서 현대의 후예들을 볼 때, 두 가지 흐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전기차 캐즘†의 실제 깊이다. 아이오닉 5는 버텼지만 아이오닉 6는 무너졌다. 하이브리드가 다시 주역으로 떠오른 현실은, 현대차의 전기차 전환 로드맵이 얼마나 유연하게 수정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다른 하나는 조선 슈퍼사이클이 구조적인가, 아니면 일시적인가다. LNG선 슬롯이 2029년 인도분까지 소진 직전이라는 소식과, 전 세계 발주량이 14%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이 동시에 존재한다. 정주영식 '일단 짓고 보기'가 통했던 시대와 달리, 지금은 사이클을 읽는 능력이 곧 생존력이다.
왜 문어발식 경영이 탄생했는가
그리고 순환출자 해소 이후 지배구조는 실제로 달라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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