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1945년 8월, 해방과 함께 일본인들이 한반도를 떠났다. 그들이 남기고 간 것은 땅과 공장과 회사들이었다. 이를 '귀속재산(적산)'이라 불렀다. 해방 당시 이 귀속재산은 국내 총자본금의 91%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이 거대한 자산을 누가 차지하느냐가 곧 전후 한국 경제의 지형을 결정했다.
미군정은 노동자들이 자체 관리하던 적산 공장들을 회수했고, 이승만 정부는 이를 정권과 가까운 기업인들에게 헐값에 매각했다. 삼성의 이병철은 이 시기에 제일제당과 제일모직 같은 구 일본기업들을 불하받았다. 대가는 정치자금이었다. 구체적인 수치로는, 훗날 5·16 이후 부정축재처리위원회 조사에서 이병철이 자유당 정부에 건넨 정치자금이 4억 2,500만 환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알려져 있다.
재벌이 탄생한 것은 몇몇 기업인의 탁월한 능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국가가 의도적으로 특정 기업들에게 돈의 통로를 열어줬고, 그 기업들은 그 통로를 가장 빠르게 통과한 집단이었다. 이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않으면 재벌의 규모를 설명할 수 없다.
일본이 남긴 공장·토지를 헐값에 불하. 시중 인플레를 감안하면 사실상 무상 증여에 가까웠다는 평가가 있다.
정부가 은행 대출 배분을 통제했다. 수출 실적을 낸 기업에는 저금리 정책자금이, 그렇지 못한 기업에는 금융 특혜가 끊겼다.
미국 원조로 들어온 설탕·밀가루·시멘트를 가공해 파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시세차익이 발생했다. 삼성의 제일제당이 이 구조의 수혜자였다.
경부고속도로 건설권은 현대건설에, 삼성전자 설립 때는 맞춤 법률이 제정됐다. 산업 할당권이 곧 재벌 서열을 결정했다.
박정희 정부는 이승만 정권처럼 '소비적 정경유착'에 그치지 않았다. 성과를 낸 기업에 보상하고, 성과를 내지 못한 기업에는 금융 지원을 중단하는 경쟁적 특혜 체계를 만들었다. 기업들은 살아남기 위해 수출에 목숨을 걸었고, 그 결과가 '한강의 기적'이라는 성장 수치로 나타났다. — 박정희 정부 경제 정책 평가, 다수 경제사학자들의 공통된 분석
이 구조의 핵심은 "정치자금 → 특혜 → 성장 → 더 큰 정치자금"이라는 순환이었다. 재벌은 성장했고, 정권은 자금을 얻었다. 둘 다 이 구조에서 이득을 봤기 때문에 누구도 먼저 끊으려 하지 않았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정경유착은 서서히 음지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구조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노태우 정권에서는 사돈 관계로 SK가 이동통신 사업권을 얻었고, 전두환 정권에서는 '부실기업 정리' 명목으로 재벌이 오히려 더 커졌다는 분석이 있다.
결정적인 변화는 두 번 왔다. 첫 번째는 1997년 IMF 외환위기였다. 대우그룹이 해체되고 수많은 재벌 계열사가 정리됐다. 두 번째는 2016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었다. 이재용을 비롯한 재벌 총수 9명이 국회 청문회장에 줄줄이 앉아야 했다. 이전 세대와 정확히 같은 기업들이, 세대만 바뀌어 같은 장면을 반복한 것이다.
| 시기 | 정경유착의 성격 | 주요 사건 |
|---|---|---|
| 이승만 정권 (1948~60) | 적산 불하 + 정치자금 교환 | 삼성·현대·LG 탄생의 토대 |
| 박정희 정권 (1961~79) | 수출 성과 연동 금융 특혜 | 전경련 설립, 중화학 공업 특혜 |
| 전두환·노태우 (1980~92) | 비자금 + 사업권 배분 | SK 이동통신, 부실기업 정리 특혜 |
| 문민정부 이후 (1993~) | 금융실명제 도입, 처벌 시작 | 전·노 전직 대통령 구속 |
| 박근혜 정권 (2013~17) | 재단 출연 방식 비자금 요구 | 국정농단, 이재용 구속 |
2026년 4월 현재, 한국의 재계 서열 1위는 공정자산 약 589조 원의 삼성이다. 이재용 회장은 2026년에도 한국 최고 부자 자리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의 자산은 약 191억~193억 달러로 추정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경유착의 형식은 달라졌다. 2025년 6월 이재명 정부 출범 직후, 이재용 회장을 포함한 대기업 총수들은 곧바로 대통령과 회동했다. 이 대통령은 "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겠다"며 규제 완화를 약속했고, 기업인들은 화답했다. 과거 물밑에서 이뤄지던 거래가, 이제는 공개적인 협력의 언어로 포장된다.
- 달라진 것: 명시적 정치자금 제공과 검은 커넥션은 사라졌다. 상법 개정으로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가 강화됐고, 소액주주 보호 제도가 도입됐다.
- 달라지지 않은 것: 대기업 총수 일가의 지배구조는 여전하다. 정권 교체 때마다 재벌 총수들이 청와대 또는 대통령실을 방문하는 관행도 이어진다.
- 새로운 형식: 이재명 정부는 ESG* 공시 의무화, 상법 개정†, 공정거래법 강화 등 제도적 규율을 강화하는 방향을 택하고 있다. '반기업'이 아니라 '공정한 규칙' 프레임이다.
- 남은 질문: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경영권 불법 승계 관련 재판이 여전히 진행 중이다. 재벌의 지배구조 문제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재벌의 탄생사를 읽고 나면 불편함이 남는다. 지금도 우리 월급의 일부는 삼성전자 주가와 연동된 퇴직연금으로 흘러들어 간다. 국민연금은 삼성그룹의 2대 주주다. 재벌의 운명이 곧 국민 노후의 일부인 구조다.
주목해야 할 두 가지 신호가 있다. 하나는 지배구조 개혁의 속도다. 상법 개정으로 이사회가 소액주주에게도 충실의무를 지게 됐다면, 재벌 오너 일가의 의사결정이 더 많은 견제를 받게 된다. 이것이 실질적으로 작동하는지가 향후 주식시장의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와 직결된다.
다른 하나는 정권과 대기업의 관계가 어떤 방향으로 제도화되는가다. 수출 지원을 위해 정부와 기업이 협력하는 것과, 특정 기업에게 특혜를 주는 것은 다르다. 그 경계선을 어디에 그을지는, 결국 시민과 유권자의 관심이 결정한다.
설탕·모직에서 반도체 제국까지
메모리 시장을 장악한 메커니즘, 그리고 2026년 HBM 경쟁의 현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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