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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포아파트 이야기 EP.29] 32년을 함께 살아온 이웃에게

legacy-road 2026. 4. 1. 15:53
[엑스포아파트 이야기 EP.29] 32년을 함께 살아온 이웃에게

EP 29 · 엑스포아파트 이야기

32년을 함께 살아온 이웃에게

같은 골목을 걸어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한 마디를 건넵니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다 알지 못하면서도, 32년 동안 같은 단지에서 같은 계절을 보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이웃입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옆집 이름을 모릅니다

510동 같은 층에 사는 분이 계십니다. 아주 오래전부터요. 제가 이사 왔던 1990년대 중반부터 항상 그 자리에 계셨던 것 같습니다.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고개를 숙이고, 명절이면 떡이나 과일을 나눠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분의 이름을 모릅니다. 몇 호에 사시는지는 알지만, 이름은 끝내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그게 아파트 이웃이라는 사이의 특성이기도 하겠지만, 생각해보면 조금 아쉽기도 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저는 그런 분들을 떠올렸습니다. 이름은 모르지만, 함께 이 공간을 지켜온 분들. 이 포스팅은 그분들께 드리는 이야기입니다.

"이름을 몰라도 이웃입니다.
같은 골목을 걸어온 것으로 충분합니다."

— 전민동 주민의 메모 중에서

우리가 함께 만들어온 시간들

1994년 5월, 엑스포아파트가 처음 준공되었습니다. 그 해 여름, 처음 입주한 분들은 아직도 여기 계실까요. 당시 서른이었던 분이라면 지금은 예순두 살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사이에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랐고, 대학에 가고, 또 결혼을 했겠지요.

이 단지가 겪어온 32년은 단순히 건물이 낡아온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이 펼쳐진 시간이기도 합니다.

  • 1994준공
    처음 이 문을 열었던 날

    51개동, 3,958세대에 새 가족들이 짐을 풀었습니다. 엑스포 과학공원 바로 옆, 미래를 담은 이름의 아파트.

  • 2000년대성장기
    아이들이 자라던 시절

    놀이터엔 항상 아이들이 있었고, 계단 입구마다 자전거가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방과 후 아이들 웃음소리가 단지를 가득 채웠던 시절.

  • 2010년대변화기
    하나둘 이사 가던 이웃들

    새 아파트들이 들어서면서, 낯익은 얼굴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빈 집이 늘고, 골목이 조금씩 조용해졌습니다.

  • 2026현재
    그래도 남아있는 사람들

    그 많은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이 골목에 있는 사람들. 우리는 각자의 이유로, 여기 남아있습니다.

찬성이든 반대든, 우리는 같은 편입니다

재건축 이야기가 나오면서, 단지 안에 미묘한 긴장감이 생겼다는 걸 느낍니다. 같은 동에 사는데도, 재건축에 대한 생각이 다르면 뭔가 어색해지는 기분이랄까요.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찬성하는 분도, 반대하는 분도, 아직 모르겠다는 분도 — 모두 이 단지를 걱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고요. 방향이 다를 뿐, 마음의 뿌리는 같은 곳에 있습니다.

그 마음이, 32년을 함께 버텨온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며칠 전, 아파트 게시판에 붙은 쪽지 하나를 봤습니다. 이름도 없고, 동호수도 없었습니다. 그냥 이렇게 적혀 있었어요.

"재건축이 되든 안 되든, 우리 서로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32년 동안 잘 지냈잖아요."

저는 그 쪽지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누가 붙였는지 몰라도, 그분이 하고 싶었던 말이 정확히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 507동 계단참에서

서로 다른 처지를 이해한다는 것

오래 사신 분들은 재건축이 두렵기도 합니다. 이주 기간 동안 어디서 지낼지, 분담금은 어떻게 마련할지, 새 아파트 입주 전에 건강이 허락할지 — 걱정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분들의 걱정은 이유가 충분합니다.

반면, 오래 기다려온 분들도 있습니다. 낡아가는 시설을 매년 수리비로 버티면서, 언제쯤이면 새집에서 살 수 있을까 하고 바라는 분들도 분명 계십니다. 그분들의 기대 역시 충분히 이해됩니다.

어느 쪽이 더 옳다거나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서로의 처지를 조금만 더 헤아릴 수 있다면 — 이 과정이 조금은 덜 힘들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웃이 있어 버틸 수 있었던 것들
  • 엘리베이터가 멈췄을 때, 옆집 분이 먼저 관리실에 신고해 주셨던 일
  • 밤늦게 아이가 울면, 위층에서 "괜찮아요?" 하고 물어봐 주시던 목소리
  • 명절 전날, 누군가 현관문 앞에 두고 간 이름 모를 떡 한 봉지
  • 주차 자리가 없어 곤란할 때, 흔쾌히 잠깐 빼주셨던 옆 동 차주
  • 태풍이 지나간 다음 날, 다들 나와서 함께 쓰레기를 치우던 오전

결국 우리가 결정합니다

재건축은 기술적으로 복잡한 절차이지만, 그 시작과 끝은 사람입니다. 법이 정한 동의율이 채워지려면, 결국 이 단지 주민 한 명 한 명의 판단이 모여야 합니다.

그 판단을 재촉하거나 방향을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판단하기 전에, 혹시 오해나 잘못된 정보가 섞여 있지는 않은지 한 번만 더 살펴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옆집 분과, 같은 동 분과 — 조심스럽게라도 한 번 이야기를 나눠보시면 좋겠습니다. 서로의 사정을 들을수록, 더 나은 판단이 나온다고 믿습니다.

"이 단지의 앞날을 결정하는 사람은
외부의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여기 남아있는 우리입니다."

마지막으로, 감사합니다

이 시리즈를 시작할 때, 저는 그저 이웃 분들과 재건축 이야기를 제대로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어렵고 딱딱한 법률 용어 뒤에 가려진 우리 아파트 이야기를, 좀 더 사람의 말로 풀어내고 싶었습니다.

29편을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 — 한 편 한 편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찬성하시는 분도, 반대하시는 분도, 아직 결정 못 하신 분도 — 모두 이 단지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계신 분들이라는 걸, 저는 믿습니다.

32년을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의 이야기도, 함께 써나갔으면 합니다.


다음 편 예고 · EP 30
엑스포아파트, 새로운 30년을 향해

시리즈 마지막 편입니다. 결론이 아닌, 시작으로서의 마무리를 이야기합니다. 앞으로의 30년을, 이 단지와 함께할 우리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 안내
이 포스팅은 엑스포아파트 재건축 과정을 주민 시각으로 기록한 시리즈의 일부입니다. 재건축 찬반을 권유하거나 특정 입장을 지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 않으며, 최종 판단은 독자 개인의 상황과 가치관에 따라 이루어져야 합니다. 법적·재정적 결정 전에는 반드시 전문가 상담을 받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