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게도, 저는 옆집 이름을 모릅니다
510동 같은 층에 사는 분이 계십니다. 아주 오래전부터요. 제가 이사 왔던 1990년대 중반부터 항상 그 자리에 계셨던 것 같습니다.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고개를 숙이고, 명절이면 떡이나 과일을 나눠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분의 이름을 모릅니다. 몇 호에 사시는지는 알지만, 이름은 끝내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그게 아파트 이웃이라는 사이의 특성이기도 하겠지만, 생각해보면 조금 아쉽기도 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저는 그런 분들을 떠올렸습니다. 이름은 모르지만, 함께 이 공간을 지켜온 분들. 이 포스팅은 그분들께 드리는 이야기입니다.
"이름을 몰라도 이웃입니다.
같은 골목을 걸어온 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온 시간들
1994년 5월, 엑스포아파트가 처음 준공되었습니다. 그 해 여름, 처음 입주한 분들은 아직도 여기 계실까요. 당시 서른이었던 분이라면 지금은 예순두 살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사이에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랐고, 대학에 가고, 또 결혼을 했겠지요.
이 단지가 겪어온 32년은 단순히 건물이 낡아온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이 펼쳐진 시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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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준공처음 이 문을 열었던 날
51개동, 3,958세대에 새 가족들이 짐을 풀었습니다. 엑스포 과학공원 바로 옆, 미래를 담은 이름의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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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성장기아이들이 자라던 시절
놀이터엔 항상 아이들이 있었고, 계단 입구마다 자전거가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방과 후 아이들 웃음소리가 단지를 가득 채웠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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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변화기하나둘 이사 가던 이웃들
새 아파트들이 들어서면서, 낯익은 얼굴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빈 집이 늘고, 골목이 조금씩 조용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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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현재그래도 남아있는 사람들
그 많은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이 골목에 있는 사람들. 우리는 각자의 이유로, 여기 남아있습니다.
찬성이든 반대든, 우리는 같은 편입니다
재건축 이야기가 나오면서, 단지 안에 미묘한 긴장감이 생겼다는 걸 느낍니다. 같은 동에 사는데도, 재건축에 대한 생각이 다르면 뭔가 어색해지는 기분이랄까요.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찬성하는 분도, 반대하는 분도, 아직 모르겠다는 분도 — 모두 이 단지를 걱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고요. 방향이 다를 뿐, 마음의 뿌리는 같은 곳에 있습니다.
그 마음이, 32년을 함께 버텨온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며칠 전, 아파트 게시판에 붙은 쪽지 하나를 봤습니다. 이름도 없고, 동호수도 없었습니다. 그냥 이렇게 적혀 있었어요.
"재건축이 되든 안 되든, 우리 서로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32년 동안 잘 지냈잖아요."
저는 그 쪽지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누가 붙였는지 몰라도, 그분이 하고 싶었던 말이 정확히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처지를 이해한다는 것
오래 사신 분들은 재건축이 두렵기도 합니다. 이주 기간 동안 어디서 지낼지, 분담금은 어떻게 마련할지, 새 아파트 입주 전에 건강이 허락할지 — 걱정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분들의 걱정은 이유가 충분합니다.
반면, 오래 기다려온 분들도 있습니다. 낡아가는 시설을 매년 수리비로 버티면서, 언제쯤이면 새집에서 살 수 있을까 하고 바라는 분들도 분명 계십니다. 그분들의 기대 역시 충분히 이해됩니다.
어느 쪽이 더 옳다거나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서로의 처지를 조금만 더 헤아릴 수 있다면 — 이 과정이 조금은 덜 힘들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 엘리베이터가 멈췄을 때, 옆집 분이 먼저 관리실에 신고해 주셨던 일
- 밤늦게 아이가 울면, 위층에서 "괜찮아요?" 하고 물어봐 주시던 목소리
- 명절 전날, 누군가 현관문 앞에 두고 간 이름 모를 떡 한 봉지
- 주차 자리가 없어 곤란할 때, 흔쾌히 잠깐 빼주셨던 옆 동 차주
- 태풍이 지나간 다음 날, 다들 나와서 함께 쓰레기를 치우던 오전
결국 우리가 결정합니다
재건축은 기술적으로 복잡한 절차이지만, 그 시작과 끝은 사람입니다. 법이 정한 동의율이 채워지려면, 결국 이 단지 주민 한 명 한 명의 판단이 모여야 합니다.
그 판단을 재촉하거나 방향을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판단하기 전에, 혹시 오해나 잘못된 정보가 섞여 있지는 않은지 한 번만 더 살펴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옆집 분과, 같은 동 분과 — 조심스럽게라도 한 번 이야기를 나눠보시면 좋겠습니다. 서로의 사정을 들을수록, 더 나은 판단이 나온다고 믿습니다.
"이 단지의 앞날을 결정하는 사람은
외부의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여기 남아있는 우리입니다."
마지막으로, 감사합니다
이 시리즈를 시작할 때, 저는 그저 이웃 분들과 재건축 이야기를 제대로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어렵고 딱딱한 법률 용어 뒤에 가려진 우리 아파트 이야기를, 좀 더 사람의 말로 풀어내고 싶었습니다.
29편을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 — 한 편 한 편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찬성하시는 분도, 반대하시는 분도, 아직 결정 못 하신 분도 — 모두 이 단지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계신 분들이라는 걸, 저는 믿습니다.
32년을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의 이야기도, 함께 써나갔으면 합니다.